朝 조선의 결
제19대 왕

숙종 이순

제19대 왕

생몰
1661–1720
재위
1674–1720
지도에서 가계도·인물 관계 보기

생애와 통치

현종의 외아들로 즉위

이순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아들로 1674년 왕위를 이었습니다. 긴 재위 동안 국왕이 직접 정국의 주도 세력을 바꾸는 방식으로 강한 왕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를 환국 정치라고 부릅니다.

세 차례 환국과 왕실 문제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의 집권이 뒤바뀌었습니다. 인현왕후의 폐위와 복위, 희빈 장씨와 세자 문제도 정국 교체와 결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송시열 등 많은 사람이 처벌되거나 죽었습니다.

제도와 경제 기반의 확장

대동법의 시행 지역을 넓히고 상평통보의 유통을 확대했습니다. 토지 조사와 군영 정비, 북한산성 축성 등이 이루어졌으며 울릉도·독도 및 북방의 경계 문제도 국가적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민생·국방 사업은 환국의 정치와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경종과 영조 시대에 남은 갈등

말년에는 세자가 대리청정을 했고 1720년 세자 경종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경종과 연잉군을 둘러싼 노론·소론의 대립은 숙종 말 정치에서 이미 자라났고, 다음 두 왕대의 계승 갈등과 탕평 정책으로 연결됩니다.

역사 속 이야기

백두산에 세운 돌 하나로 국경이 모두 분명해졌을까

1712 · 백두산 정계비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말은 지도에서 보면 간단하다. 하지만 깊은 산속에서 강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확인하는 일은 달랐다. 산삼을 캐거나 사냥하며 강을 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숙종 대 조선과 청은 변경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경계를 조사하게 되었다.

1712년 청의 목극등이 파견되었다. 조선의 관원과 수행원들도 조사에 참여했지만 지위와 이동 조건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백두산 일대의 지형을 실제로 살피는 일과 두 나라의 외교적 관계가 동시에 작용했다. 현장에서 누가 무엇을 보았는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정계비에는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을 기준으로 경계를 삼는다는 내용이 새겨졌다. 그런데 돌에 문장을 남겼다고 강의 발원지와 지형을 둘러싼 해석까지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뒤에 변경의 거주와 개간이 늘면서 토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다시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숙종의 시대를 환국과 왕비 교체 밖으로 넓혀 준다. 나라의 경계는 궁궐에서 선언만 한다고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산길을 걷고 물길을 찾으며 이웃 나라와 협의해야 했다. 비석은 문제를 정리한 결과이면서 뒤의 사람들이 그 뜻을 다시 묻게 되는 자료가 되었다. 한 왕대의 결정이 훨씬 뒤의 국경 논쟁과 이어지는 장면이다.

함께 살펴볼 인물과 관계

배우자·부모·자녀뿐 아니라 정치적 협력과 대립, 왕위 계승으로 연결된 인물입니다. 구체적인 연결 이유는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숙종 시대를 다룬 사극

다음 작품은 이 인물이나 시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작 설정과 역사적 배경의 차이는 지도 속 작품 설명에서 확인하세요.

생애 자료

숙종 이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