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 조선의 결
제21대 왕

영조 이금

제21대 왕

생몰
1694–1776
재위
1724–1776
지도에서 가계도·인물 관계 보기

생애와 통치

계승 갈등 속에서 즉위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 이금은 연잉군으로 지내다가 경종의 왕세제가 되었고 1724년 즉위했습니다. 신임옥사의 기억과 경종 사망을 둘러싼 의혹 속에 왕위의 정당성을 공격받았으며, 1728년 이인좌의 난도 겪었습니다.

탕평으로 정치의 균형을 찾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누그러뜨리고 국왕이 인사를 주도하는 탕평책을 추진했습니다. 다만 모든 당파를 똑같이 포용한 것은 아니었고, 왕의 판단에 따르는 관료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습니다.

균역법과 제도의 정비

군포를 줄인 균역법으로 백성의 부담을 덜고 부족한 재정은 다른 세원으로 보충하려 했습니다. 『속대전』 편찬, 형벌 개선, 청계천 준천 등도 추진했습니다. 장기 재위 동안 행정과 생활 제도를 정비한 성과가 남았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

1762년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은 통치의 가장 큰 비극으로 남았습니다. 손자 정조가 사도세자의 친아들이면서 효장세자의 후사를 잇게 되었고, 1776년 영조 사후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역사 속 이야기

군포를 절반으로 줄이면 모자란 돈은 누가 낼까

1750–1752 · 균역법의 재원 마련

군대에 직접 가는 대신 내는 군포는 백성의 생활을 짓누르는 부담이었다. 영조가 두 필을 한 필로 줄이려 하자 곧바로 반론이 나왔다. 군포로 운영하던 군영과 국가의 일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세금을 줄이겠다는 뜻에는 동의해도, 줄어드는 수입을 메울 방법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1750년 감필을 시작한 뒤에도 제도의 정비는 이어졌다. 균역청을 두고 다른 재원을 마련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토지에 결작을 부과하고 어장과 소금, 선박에서 거두는 세금 등을 활용했다. 일부 궁방과 기관이 차지하던 수입을 국가 쪽으로 모으는 일도 이루어졌다. 한 사람의 부담을 줄이는 결정이 다른 특권과 수입 구조를 건드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모든 신분에게 똑같은 부담을 지우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기존 신분 질서의 벽이 남았고 토지에 붙은 부담이 경작자에게 전가될 여지도 있었다. 군포가 절반이 되었다는 숫자만으로 백성의 실제 생활을 모두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장부에서 사라진 부담이 다른 통로로 되돌아오지 않는지도 살펴야 했다.

균역법은 한 번의 선포보다 여러 해의 재정 조정으로 완성된 제도였다. 영조의 역할을 보면 백성을 위한다는 의지만큼 그 선택을 지속할 재원을 찾는 일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개혁은 누구에게서 덜 거둘 것인가와, 그 대신 누구의 몫을 줄이고 어디에서 더 거둘 것인가를 함께 풀어야 움직였다.

함께 살펴볼 인물과 관계

배우자·부모·자녀뿐 아니라 정치적 협력과 대립, 왕위 계승으로 연결된 인물입니다. 구체적인 연결 이유는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조 시대를 다룬 사극

다음 작품은 이 인물이나 시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작 설정과 역사적 배경의 차이는 지도 속 작품 설명에서 확인하세요.

생애 자료

영조 이금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